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(문단 편집) === [[김영덕]] 감독 시대 === 1977년 재단이 한화그룹인 [[북일고등학교]]는 야구부를 창단했고, 전국 각지에서 우수한 중학야구의 인재를 모으면서 초반부터 다크호스로 불리기 시작했다. 그 증거로 창단 2년 만인 1978년 [[봉황대기]]에서 4강에 든 것이 대표적이다. 초대 감독은 훗날 한화의 첫 우승을 이끄는 [[이희수(야구)|이희수]] 감독이지만 그는 한 해만에 코치로 내려앉게 되고[* 그러나 1982년 김영덕 감독이 OB 창단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다시 북일고 감독이 됐다.]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바로 [[김영덕]] 감독. [[김종희]] 북일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아낌없는 신임을 받은 김영덕 감독은 1978년 부임해 [[김진욱(1960)|김진욱]]과 [[이상군]] 같은 우수한 투수들을 길러 내면서 1980년 이상군을 앞세워 [[봉황대기]] 우승을 만들어 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youtube(hgrEmVje7O0)]}}} || || {{{#ffffff 1980년 [[배재고등학교 야구부|{{{#ffffff 배재고}}}]]와의 봉황기 결승전}}} || 특히 1980년과 1981년은 고교야구의 올스타 집합소라고 할만큼, 훗날 프로무대에서 날고 뛰는 선수들이 던지던 시대였는데, 그 시대에 우승을 차지한 것은 분명한 업적이었다. 다만 여기에는 약간의 편법도 존재했는데, [[현대 피닉스|한화그룹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스카웃]]을 했고, 원래대로면 강원도 학교에 갈 법한 [[김진욱(1960)|김진욱]]이나, 청주 출신의 [[이상군]]이 천안으로 온 것은 한화그룹의 재력 덕분이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CFXnUKQ.png|width=100%]]}}} || || {{{#ffffff 넘어지는 주자가 안성수. 3루에 있는 주자는 임학빈 }}} || 1982년 [[OB 베어스]] 창단 감독으로 김영덕 감독이 떠나고, 북일고 초창기 시절의 최후의 에이스였던 안성수[* 1965년 5월 20일생. 천안북일고와 한양대를 거쳐 1987년 빙그레 구단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으나 고교~대학 시절 무리로 인한 어깨 통증, 구위 약화 등으로 인해 2군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별다른 활약 없이 2군을 전전하고 1군 경기에는 가뭄에 콩 나듯 출장하다가 1991년 시즌이 끝난 뒤 은퇴. 이후로는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사업을 하다가 2008년 2월 24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.[[http://kin.naver.com/qna/detail.nhn?d1id=10&dirId=100102&docId=57728245&qb=7JWI7ISx7IiY&enc=utf8§ion=kin&rank=1&search_sort=0&spq=1|#]] 참고로 선수 시절 등 번호는 21번이었으며. 후에 빙그레의 21번 등 번호는 1990년에 [[송진우(야구)|송진우]]가 달게 되었다.]는 [[조계현]]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두 번의 준우승, 그리고 선수 자신은 엄청난 혹사로 야구 인생이 끝나면서 비운의 투수로 남고 말았다. 그 대신 1983년 청룡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, 그렇게 북일고의 초창기가 저물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youtube(GdxDWVrfULU)]}}} || || {{{#ffffff 1983년 [[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|{{{#ffffff 포항공고}}}]]와의 청룡기 결승전}}} 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